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난트 1세 (문단 편집) == 황제 즉위 == 페르디난트는 1547년까진 [[카를 5세]]와 거의 트러블이 없었는데, 그때까지는 형의 의중을 전적으로 따랐다. 그런데 1546~1547년에 카를과 협력해 프로테스탄트 세력인 슈말칼덴 동맹을 무찔러 뷔르템베르크를 탈환한 뒤 문제가 발생했다. 이후 카를 5세는 뷔르템베르크에서 페르디난트 1세가 갖고 있던 권리를 회복시키지 않았다. 머지않아 페르디난트를 [[토사구팽]]하고, 자신의 장남인 [[펠리페 2세|필리프]]에게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비롯한 모든 영지를 물려주려고 시도한 카를 5세의 의도가 더욱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형제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카를 5세는 애초에 넓은 영토를 통치하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으로 동생에게 제국의 통치를 위임했지만,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그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전까지 형에게 고분고분하는 순둥이로만 보였던 페르디난트는 카를 5세가 생각했던 것만큼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지난 30년간 독일을 통치하며 쌓아온 페르디난트의 덕이 이때부터 빛을 발휘했다. 성공한 2인자의 전형이라 할 만한 인생을 살았던 페르디난트 1세는 상사인 자신의 형 카를 5세에게뿐만 아니라, 명목상 자신의 하급자인 독일 제후들에게도 권위를 내세우는 방식 대신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들에게 협력을 구하는 방식을 택했다. 황제의 권위를 내세우며 제후들을 강압적으로 복종시키려고 했던 카를 5세에 비해[* 황제의 직속 군사력이 압도적이였다면 가능했겠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강압적으로 나가려 했던 것이 카를 5세의 큰 실수였다. 황제의 직속 군사력은 사실상 스페인 군대에 한정되었는데 당시 [[스페인군]]은 세계 최강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독일까지 오기 위해선 기나긴 항해를 해야만 했고 스페인 귀족들이 아무리 카를 5세에게 헌신적인 충성을 바쳤다 한들 굳이 독일까지 원정을 가야할 현실적인 이유가 없었다.] 페르디난트는 그 사이에서 대리인이자 중재자로서, 형 카를 5세의 의지를 수행하면서도 독일의 현실을 직시하고 형의 강경책을 완충해주는 역할을 했다. 카를 5세는 신교도에 대해 자비없는 탄압을 명했지만 페르디난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등을 위해, 신교도 제후들에게 결코 적극적인 탄압을 실행하지 않았고 그들에게도 협력을 구했다. 페르디난트 1세가 이러한 덕을 쌓은 덕분에 카를 5세가 자신의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독일의 제후들은 신교, 구교 가릴 것 없이 모두 [[펠리페 2세]]를 반대하고 페르디난트 1세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미 오래 전에 페르디난트 1세가 선거에서 차기 황제로 선출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카를 5세가 황제의 권위로 구실을 갖다 붙여 페르디난트 1세를 독일왕에서 폐위시키고 다시 선거를 실시한다 하더라도, 결국 황제 투표권을 지닌 것은 선제후들이었으므로 이미 제후들의 여론이 돌아선 상황에서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카를 5세는 1553년 아들의 제위 계승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황제로서 사실상 실권을 모두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카를 5세는 1556년 1월 제위에서 퇴위를 선언하고 동생에게 제위를 넘겨주었다. 이어 8월에는 스페인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었고 그의 아들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로 즉위했다.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네덜란드 지방]]은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지만 카를 5세의 마지막 강력한 의지[* 본인의 고향이어서 아들에게 물려주려는 의지가 강했다.]에 의해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가 스페인 영토가 되었다. 이로써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이는 단순히 스페인계와 분가한 수준이 아니라, 페르디난트 1세를 통해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광대한 영토가 새로 합스부르크 가문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제국이 분단되며 가문의 재출발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 이후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리는 영토를 통칭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페르디난트는 퇴위한 형 카를이 스페인에 아직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선제인 형을 존중하여 대관식을 미루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 의회도 카를 5세의 퇴위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 역시 페르디난트 1세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카를 5세의 퇴위 승인은 2년 넘게 미루어지다가 1558년 초에야 이루어졌다. 1558년에 형 카를이 스페인의 은둔지 유스테 수도원에서 사망하자 비로소 황제 대관식을 치뤘다. 그러나 카를 5세가 양위를 선언한 시점부터 페르디난트의 제위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황제로서의 공식 통치 기간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8년 남짓 이어졌다. 재위 기간에 페르디난트는 조카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해나갔다. 특히 합스부르크 제국과 스페인은 가톨릭의 수호와 재건에서 서로 우호적이며 협력하는 긴밀한 관계였다. 그러나 이미 노년에 접어들은 페르디난트 1세는 1560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기침과 고열에 시달렸다. 나중에는 누워 지낼 정도로 악화되자 장남 막시밀리안이 섭정으로 아버지의 업무를 대신했다. 결국 페르디난트 1세는 1564년에 오스트리아 [[빈(오스트리아)|빈]]의 [[호프부르크]]에서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시신은 보헤미아 왕국의 [[프라하]]에 있는 성 비타 대성당에 먼저 사망한 왕비 언너의 곁에 매장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의 사망 이후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세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막시밀리안 2세]]는 [[빈(오스트리아)|빈]]을 포함한 [[니더외스터라이히|하오스트리아]]와 [[오버외스터라이히|상오스트리아]]를, 페르디난트 2세는 [[인스브루크]]를 포함한 [[티롤]]과 외지오스트리아[* [[슈바벤]]과 [[알자스]]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월경지]].]를, 카를 2세는 [[그라츠]]를 포함한 내지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카르니올라 공국|크라인 공국]], [[고리치아-그라디스카 후백국|괴르츠 백국]], [[트리에스테 제국직할 도시|트리에스트]]를 포함한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일부]를 상속받았다. 막시밀리안 2세의 [[루돌프 2세|아들]][[마티아스(신성 로마 제국)|들]]은 모두 후계자 없이 사망하였고, 페르디난트 2세에게는 티롤 분가를 이을 적법한 아들이 없었기에[* 첫번째 결혼은 [[귀천상혼]]이었고, 두번째 결혼에서는 아들을 보지 못했다.] 카를 2세의 내지오스트리아 분가에서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상속받았다. 본가가 된 내지오스트리아 분가는 [[페르디난트 2세|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3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티롤과 외지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오스트리아 전역을, 그의 남동생 레오폴트 5세가 티롤과 외지오스트리아를 상속받으며 재차 갈라졌다.[* 레오폴트 5세의 아들들인 페르디난트 카를과 지기스문트 프란츠가 모두 후계자 없이 사망하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손자 [[레오폴트 1세]] 대에 오스트리아가 재통합되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토스카나 대공국]]같은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하지 않는 영토는 분할하되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분할 상속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